자주자강의 정신을 실천한 국채보상운동의 서상돈 고택 (대구)
여행날짜: 2023년4월29일(토) ~ 2023년4월30일(일)
▶국채보상운동 서상돈
서상돈(1850~1913)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시작해 큰 부자가 된 대구 출신의 민족 자산가이다. 달성 서씨인 서상돈의 집안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서상돈의 고조 할아버지 서광수는 1784년(정조 8) 무렵 5명의 아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하지만 이듬해 1785년 3월의 천주교 박해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서상돈은 1850년 10월 17일(음력) 경상북도 김천의 마잠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서철순은 서상돈이 9세 때인 1859년(철종 10)에 돌아가셨고, 가족들의 생계 는 대구 새방골의 죽전에서 외할아버지 김후상의 보살핌 속에 꾸려나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 부터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던 서상돈은 18세 무렵 당시 대구 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 (김수환추기경의 외할아버지) 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보부상(負商)을 시작하였다. 부지런히 일하며 사업을 확장해나가던 그는 35세인 1885년(고종 22)에 이미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이 되었고, 한 해 3만 석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만큼의 큰 부자가 되어 대구의 유력한 경제인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격심해지면서 큰아버지 서인순, 삼촌 서익순. 서태순의 고난과 순교를 목격한 뒤부터 근검절약하며 천주교의 전교활동과 구제 · 자선 활동에 전념하기로 굳게 결심한다.
1885년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신나무골 교우촌(지금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으로 옮겨 오면서부터 서상돈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함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891년 12월의 대어벌 임시성당 건축, 1897년 계산동의 성당 건축등에 서상돈은 기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1911년 바티칸 교황청이 주교 소재지로 전주와 대구를 놓고 고심하고 있을 때, 운동을 통해 대구로 낙점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시 주교관 부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서상돈은 또한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그 운영을 도왔다. 1899년 계산동 성당 부속건물에 한문서당인 해성재를 설립하였으며, 1908년 봄에는 이 해성제를 성립학교로 바꾸어 개교하였다. 그리고 1910년 성립 여학교가 개설될 때 재정을 지원하고 운영에 참여했다.
1905년 대구 달서여학교 설립했다. 1906년에는 교과서, 계모 오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 을 발간하기 위한 대구 광문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1896년 독립 협회가 설립되었을 때에도 서상돈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대한제국정부는 1,300만 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빌려쓰면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이때 서상돈은 일본 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인식하면서,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이 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회를 설립하고 최초 민중 대회인 군민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신분을 초원한 전국의 모든 남녀노소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 되었고, 해외 한인들 에게까지도 전파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국권회복을 위해 온 국민을 단결시킨 자발적인 사회운동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 중에서
"지금 국채 1,300만 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갚으면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 추세일 것입니다.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라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
2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 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붙이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호소합니다. 대한 신민의 여러분들은 보시는 대로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고 알려서 한 사람도 모르는 이가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상(聖上)께 보답하고 아래로는 우리 강토를 우지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 여행일기 <2023년4월29일(토) ~ 2023년4월30일(일)>
계산 성당을 지나 아내와 나는 근대 문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근대 문화 골목은 도심 한 가운데서 옛 가옥들을 볼 수 있는 점이 특이했다. 근대 가옥들은 우리가 역사 시간에만 들었던 이상화, 서상돈 등 위인들이 직접 살았던 곳이었다. 100여년전 나라를 뺏긴 조상들이 살던 곳이라 생각하니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내와 한참을 근대 문화골목을 둘러보니, 갑자기 비가 왔다. 비가 와서 그 때는 습하고, 옷이 빗물이 젖어서 여행을 하기 불편했지만, 지나고 보니 선선한 바람도 불었고,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줘서 여행을 하기 좋은 날씨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날씨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여행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아내와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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