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체험 장소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고택 (대구)

by 이터널스드림캐쳐 2023. 5. 1.
반응형
반응형

빼앗긴 들에서 봄을 염원한 <이상화 고택>

여행날짜: 2023429() ~ 2023430()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팸플릿
이상화 고택 팸플릿

 

이상화 고택 팸플릿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

이상화는 아름다운 서정적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식민 지 시대에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운 192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저항 시인이다.

1920년대 우리 시의 경향은 낭만주의, 상징주의, 퇴폐주의 등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문예사조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상화는 그러한 문예사조들을 과감히 탈피하고 민족의 현실로 눈을 돌려 민족 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빼어난 저항시들을 남겼다.

이상화는 190159(음력 45), 현재의 대구시 중구 서문로 212번지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사이의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상화의 집안은 당시 대구의 명문가로, 그가 7살 때 부친 이시우의 사망으로 백부 이일우의 가정 사숙에서 교육을 받다가 15살 때 경성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백부 이일우는 당시 3천석지기인 민족자본가였으며, [우현서루]를 운영하며 서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여 민족 지사를 양성했다.)

가까운 친구로는 박태원, 현진건, 오상순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백조 동인과 교남학교의 친구들이 있다. 이들 중 백기만은 1917년 대구에서 동인지<거화()>를 함께 출간했고 3.1 운동 때 대구에서 이상화와 더불 어 학생 봉기에 앞장섰던 인물로 백기만은 대구 고보의 연락책을 맡고 이상화는 계성 학교의 책임을 맡으며 3.1운동의 민족 봉기에 앞장섰다.

이상화는 1922<백조>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 [나의 침실로]와 같은 낭만적 서정시를 발표했으며, 1922년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도쿄 로 건너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조국으로 귀국한다.

이후 그의 시는 현실로 눈을 돌려 [가장 비통한 기욕] [가상], [조선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개벽]에 발표하였다.

1925년과 1926년은 상화의 작품 활동 절정기로, 작품의 3분의 2를 발 표한다. 이 두 해는 이상화의 창작 열정이 분출한 해이기도 하지만 관동 대지진의 쓰라린 체험 뒤의 귀국과 거기서 받은 민족적 상처와 울분, 국 내 각지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노동자들의 파업, 우리 민족의 간도, 만주 이민의 참상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

이 중, 1926년에 <개벽 70>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작가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나라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식민지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주된 흐름으로 하고 있다.

1927년 이후 이상화는 <이종암 사건>,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었고, 이후로도 일본인들의 감시와 가택수사 등의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19373월에는 독립투사인 형 이상(李相定)장군을 만나러 만경 ()3개월간 갔다 와서 일본 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 설하기도 하였다.

교남학교를 그만둔 뒤 춘향전의 영역본()과 국문학사 등을 기획하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943425일 위암으로 불꽃같은 시인의 삶을 마감했다.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대구시 중구 계산동 284번지 이상화 고택을 2002년 대구 시민의 힘으로 지 2008812일 개관하게 되었다. 시민의 숙원사업으로 이루어진 이상화 고택은 역사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시 [서러운 해조]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에는 1948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시비 [나의 침실로]가 있으며, 대구 두류공원에는 1996년에 이상화 동상과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세워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여행일기 <2023429() ~ 2023430()>

계산 성당을 지나 아내와 나는 근대 문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근대 문화 골목은 도심 한 가운데서 옛 가옥들을 볼 수 있는 점이 특이했다. 근대 가옥들은 우리가 역사 시간에만 들었던 이상화, 서상돈 등 위인들이 직접 살았던 곳이었다. 100여년전 나라를 뺏긴 조상들이 살던 곳이라 생각하니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내와 한참을 근대 문화골목을 둘러보니, 갑자기 비가 왔다. 비가 와서 그 때는 습하고, 옷이 빗물이 젖어서 여행을 하기 불편했지만, 지나고 보니 선선한 바람도 불었고,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줘서 여행을 하기 좋은 날씨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날씨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여행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아내와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반응형